서리가 내리고 나면 텃밭의 식물들은 성장을 멈춘다. 여름에 심은 배추와 무, 알타리, 파, 갓은 김장을 위해 추운 날씨에도 걱정없이 크지만 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랗고 싱싱하게 기어다니던 호박덩굴이 거무 틱틱한 빛을 띠고 늘어져 있다. 울타리콩 넝쿨은 호박과 달리 싱싱하게 옥수수 마른 대를 타고 올라가 담장 밖을 내다보고 있다. 서리내리기 전에 노랗게 말라가는 꼬투리를 보여줘야 하는데 아직고 초록빛이다. 아마도 조금 늦게 심어서이거나 55일간의 긴 장마로 인해 익어가지 못했던게 아닐까.
텃밭을 둘러보니 차가운 날씨탓인지 조금은 움츠러든 표정이다. 한낮이 되면 언제그랬냐는 듯 활짝 웃고 있는 표정인텐데. 어린 아기와 같은 표정이다.
울타리콩도 이젠 키크기를 포기하고 있을 것이다.
마당을 정리하기도 해야해서 울타리콩 줄기를 모두 잘랐다. 잘려진 울타리콩줄기에는 파란 꼬투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텃밭 가운데에서 울타리콩 꼬투리를 땄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마당 구석에 있는 진돗개도 엎드리고 우리를 평화롭게 바라보고 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평화 한 가운데에 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라는 거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시간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시간이다. 성급하게 현재를 꾸미는 스트레스의 시간은 정지된 상태다. 꼬투리 속에 오롯이 안겨있는 어린 천사에 감동하며 간간이 부는 바람에 의지하여 행복을 맛보는 시간이다.
그에 반해 현재의 시간, 힘들기만 한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한다. <유쾌함의 기술>을 쓴 앤서니 T. 디베네뎃은 유쾌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 중에 한 가지로 자연에 대한 경이감을 기술하였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자연을,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꼬투리를 까는 지루한 시간이 행복감으로 쌓이는 것은 자연의 신비에 경이감을 갖기 때문이다.
까놓은 울타리콩이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었다. 초록 꺼풀을 벗어버리고 나니 새로운 모습이다.
까도까도 줄어들지 않을 만큼 울타리콩이 많이 열렸다. 꽉찬 것도 있지만 깨알만큼 작은 것도 있고 새끼손톱만한 것도 있다. 역시 꽉찬 것은 색깔도 빠알가니 예쁘고 단단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다. 덜 익은 것은 작기도 하지만 물렁거린다.
쪄서 먹으면 맛있다고 해서 울타리콩을 꼬투리째 쪘다. 겉껍질이 물렁해지니 까먹기도 쉽고 맛도 있다. 까느라 손가락이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그 맛에 취한다. 포슬거리는 식감과 고소함이 입안에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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