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옆에 작은 동그란 꽃밭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꽃을 심어 키웠다. 봉숭아도 피고 접시꽃도 한쪽에 피어서 내 키만큼 자랐다. 하얀 꽃이 탐스럽게 피어 올라가고 씨앗도 맺었다.
소나무와 영산홍, 딸기, 한련화가 살고 있는 꽃밭에 또 다른 접시꽃들이 싹을 튀우고 아기 손바닥만큼 자라고 있었다.
‘내가 심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접시꽃 씨앗을 심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동안 황무지 같던 땅에 많은 나무와 꽃을 사거나 얻어서 심어나갔으니 기억력에 한계가 있었나 보다. 그런 나에게 실망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지.’하고 잊어버린다.
잡초에 덮여서 잘 살 수 없을 것 같아 접시꽃 모종을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그곳은 수시로 텃밭으로 드나드는 입구에 있어서 살펴보고 키우는데 용이한 곳이다. 강아지 산책시키고 돌아오면서 잎이 잘 크나 벌레 먹는 것은 없나 늘 살펴보고 물도 줄 수 있다.
한동안 옮긴 접시꽃 모종은 시들거리며 기운이 없었다.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곳에서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처럼 아마도 접시꽃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몸살을 앓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들어오는 햇살도 낯설고. 일어나 거실로 나가면 달라진 구조에 또 생경한 느낌이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못하게 되었을 때 의기소침해지던 감정은 또 어떠랴.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인 것이다. 익숙해진 시간이 아닌 바에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점점 낮아지는 기류가 심장에 흐른다.
낯선 집을 나서서 이리저리 새로운 길을 찾아 산책을 하며 내 삶을 차지하는 한 부분이 이곳이라며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강제로 제 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겨진 접시꽃이 실핏줄에 새 수액을 실어나르는 나무처럼 용기를 내어 팔다리를 뻗어나가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행히 접시꽃은 시원스럽게 하늘을 향해 컸다. 접시꽃은 지치지 않고 피고 지고 하면서 그 자리를 빛내주었다.
자리를 옮긴 곳에서 뿌리를 잘 내려 제 몫을 하고 있는 접시꽃.
늘씬한 그 모습에 나는 반했다. 더구나 빨간 꽃이 피어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정말 옮겨심기를 잘 했다. 무슨 일이나 결과가 좋아야 만족하는 법이니 빨간 꽃이라서 더 좋았던 모양이다.
허지만 접시꽃의 이파리에 잎을 돌돌말아서 잠자는 벌레가 생겨서 잘라내느라 바쁘다. 하루가 지나면 또 새로운 김밥말이가 이파리에 생겨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누에고치도 아니고 솜털같은 것에 말려있다.
알아보니 잎말이나방이라고 한다. 생길 때마다 잎을 따서 제거해버렸다. 잎말이나방은 사과나무 감나무같은 과실나무에 생기면 피해가 크다. 복숭아나무 자두나무에도 생길지 모르니 잘 살펴봐야겠다.
함박 웃음짓는 접시꽃, 내년에도 그 웃음 볼 수 있게 잎말이나방 생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접시꽃에게
아프면 아프다 하고 살아라.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아플 때는 죽을 만큼 아파야 산다.
울고 싶을 때 맘껏 울고 나면 개운해지는 것처럼.
아픔을 이 악물고 이겨내면
새 살이 돋고 새 맘이 생긴다.
봄이 되면 노란 개나리가 피고
산수유가 피고 진달래가 피는 것처럼.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하얀 꽃, 빨간 꽃 피어서
너는 이제 맘껏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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